People 2016 winter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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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신념과 열정으로 묵묵히 걸어온 장인의 외길.
그 길과 이 길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교차한다.
중요무형문화재 78호 홍정실 입사장과 오설록 억수진이 그렇게 만났다.


입사, 우리말로는 은실박이. 놋이나 쇠그릇 등 금속 표면에 금실, 은실을 땜 없이 끼워 넣어 장식하는 전통 공예기법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입사공예의 역사는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1~2세기경의 낙랑 출토유물에서 이미 고도로 발달한 입사기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그 기법과 예술성은 거듭 발전했다. 가장 화려한 절정기로 평가받는 고려 시대 은입사 기법이 후에 상감청자기술과 나전상감칠기술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입사공예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전통은 단절의 위기를 맞는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활동했던 조선 시대의 마지막 장인인 故 이학응 옹으로부터 그의 마지막 수제자 홍정실 선생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이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기예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1947년 평양 태생의 홍정실 선생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공예미술을 배우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뒤 본격적으로 전통 금속공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중 입사공예에 눈을 크게 뜬 계기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봤던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됐다.

故 예용해 선생의 저서 <인간문화재> 속 이 문장. “천만다행으로 은입사를 하는 분이 이 세상 어디에 묻혀 살아 있다면, 세계에 자랑할 고유한 민속공예의 한 부문을 되살릴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다.” 회고하기를, 무언가가 뇌리 와 가슴에 섬광처럼 꽂히는 기분, ‘내가 할 일이구나’ 하는 운명 같은 깨달음이었다고 한다. 직접 입사 기능보유자를 찾아 전국을 6년 동안 헤맨 뒤에야 이학응 옹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78세의 고령이었던 이옹은 전통의 맥을 잇겠다고 찾아온 30대 초반의 홍 선생을 기특해하며 손녀처럼 아꼈다. 예순 이후로 입사 작업에서 손을 뗀 상태지만, 1988년 별세하시기 전까지 10년 동안 정릉 자택에서 전통 입사기법을 하나하나 전수했다. 홍 선생은 스승께 원히 시들지 않는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린다. 전통 입사에 관련된 자료와 스승의 기록을 문화재관리국에 제출, 스승이 초대 입사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는 데 애썼던 것이다. 스승이 떠난 후로는 그저 정해진 운명, 천직이라 여기며 묵묵히 입사공예의 길을 걸어왔다.

국내외에서 개최한 15번의 개인전과 70여 번의 그룹전, 13번의 수상경력 같은 숫자가 그 길을 대변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미술관 국대박물관, 대만 국립역사박물관, 오스트리아 비엔날레 민속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된 사실도 선생이 그 길에서 느낀 고독과 기쁨, 낙담 과 환희를 모두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올해 선생은 일흔을 맞았다. 이 학응 옹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현재는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손에서 은실과 마치를 놓지 않는다. 촬을 위해 은실박이를 시연하면서도 흉내만 내는 게 더 어렵다며 몰입해 벼린 솜씨를 선보인다. 섬세한 공정을 수도 없이 거듭하다 보니 시력이 나빠지고 신경통을 달고 살지만, 안경 너머로 형형히 빛나는 눈과 꼿꼿하게도 곧은 기품만은 변하지 않았다.

입사 재료와 도구

은실이나 금실이 주재료다. 무늬에 맞는 색, 굵기를 선택해 준비한다. 섬세한 작업을 위해서는 다양한 크기의 송곳정, 망치, 마치, 뿔, 광쇠 등이 필요로 한다.

은실박이 과정

송곳정과 마치를 이용해 기면에 무늬를 옮겨 찍은 다음, 찍은 무늬를 따라 은실을 박는다. 광쇠로 은선을 문지르면 광이 나게 되는데, 표면과 은선이 더 단단하게 착되는 효과도 있다.

한편, 홍정실 선생의 입사공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선생이 전통 입사공예의 계승 작업에 몰두함과 동시에, 동시대와 소통하는 창조적 입사 작품을 꾸준히 모색하고 전개해왔던 점이다. 미국 G.I.A와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보석과 전문장신구 디자인을 배우고, 중국과 스페인, 인도 등 해외 전통공방을 다니며 다양한 금속 공예 기법을 연구했던 행보도 입사의 전통 기법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에서 비롯한다. 그런 선생에게 이번 오설록과의 협업은 아주 낯선 시도가 아닐 것이다.

오설록의 프러포즈로 성사된 이 프로젝트는 올해로 출시 30주 년을 맞는 오설록 억수진 제품에게 홍 선생이 은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새 옷을 입히는 것. 억수진을 키우고 짓는 제주 자연의 풍경을 입사기법으로 표현한 패키지는 자체로 한 폭 그림이다. 남쪽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너울대는 싱그러운 녹찻잎, 홀연 섬의 실루엣으로 솟은 한라산, 끝없이 펼쳐지는 차밭…. 검은 색 바탕에 새긴 이 은빛 금빛 풍경은 한 모금 빛을 머금고 나서야 비로소 빛나는 음전한 멋이 있다. 말하자면 억수진은 아주 특별한 생일선물을 받은 셈인데, 과연 축하할 만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1986년 첫 출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소비자와 만나고 있는 제품은 매우 드물고, 그래서 더 귀한 예니까. 억수진은 현존하는 오설록 제품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품일 뿐 아니라 브랜드의 40여 년 역사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대표 스테디셀러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이자 오설록 브랜드의 초석을 세운 故 서성환 회장이 특별히 애착을 가진 제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브랜드 역사를 되짚어 보면 억수진에 쏟았던 그의 애정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1979년, 서성환 회장은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던 제주 돌밭을 개간하기 시작해 1980년에 오설록의 첫 녹차 제품인 백수, 천수, 만수를 출시한다. 1984년에는 오설록 3대 제주차밭 중 가장 광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서광 차밭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년 후에 선보인 차가 바로 억수진이다. 따스한 제주 햇살이 내리쬐는 봄, 땀과 열정으로 손수 일궈낸 제주 차밭에서 싹을 틔운 차의 새순을 하나하나 정성껏 채엽하고, 또 고르고 고른 찻잎만으로 지은 명차. 억수진은 서성환 회장의 아름다운 집념을 계승하며 현재까지 그 뜻을 잇고 있는 차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억수진에 담긴 서성환 회장의 집념은, 홍정실 선생의 그것과 닮은 점이 있다. 천 년의 가치를 가졌지만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버린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복원·계승하고 또 정착시키려 했던 열정 어린 신념과, 명맥이 끊겼던 전통 입사공예를 끈질기게 되살려 당대로 이으려 했던 신념 어린 열정. 어쩌면 새롭게 태어난 억수진은 시공간을 초월해 뜻이 통하는 두 장인의 만남으로부터 완성된 것이 아닐까. 그 인연이 가느다란 은실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글. 이상현 / 사진. Studio S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