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2015 winter

안개의 도시와 애프터눈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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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해가 한 시간이나 났어” “기적이군! 영국이 스페인이 되려나봐”

이렇듯 자조적인 유머조차 자연스러운 날씨 때문일까. 안개가 자주 끼고 흐린 날이 많은 영국에서는 티타임이 그야말로 일상 그 자체다. 일 인당 하루 평균 예닐곱 잔의 차를 마신다는 통계, 세계 차 소비 1위 국가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오늘날 영국인들은 저마다 다채로운 찻자리를 즐긴다. 로열 패밀리의 호화로운 티 타임부터 가정집에서 여는 다정다감 티 클래스까지, 영국 차 문화의 ‘오늘’을 대표하는 알짜배기 명소들을 찾았다.

Gallery Mess ADRESS 1 King’s Road, London SW3 4RY, UK / WEB www.saatchigallery.com/gallerymess

런던 하이드파크 끝자락에 위치한 켄싱턴 궁전.

격식 갖춘 영국식 티타임의 정수를 맛 볼 수 있는 오랑제리 The Orangery 티룸은 故 다이애나비가 살았던 곳으로도 유명한 이곳 켄싱턴 궁의 널따란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호젓한 산책길의 경유지 혹은 종착지로 손색이 없다. 18세기, 앤 여왕을 위해 온실을 개조해 만든 궁전이었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은 오랑제리를 맞닥뜨리는 순간, 머리가 아닌 눈으로 먼저 깨닫는다. 클래식한 18세기 건축양식을 따른 높은 천장과 커다란 유리 창문, 우아한 인테리어, 그리고 아름다움의 정점을 찍는 정원을 지켜보자면, 마치 열쇠 구멍으로 영국 왕실 가문의 생활상을 엿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 그 ‘로열’의 분위기에 흠뻑 젖고 싶다면 오랑제리의 애프터눈 티를 경험해보자. ‘로열 애프터눈 티’라는 이름이 붙은 티 세트 메뉴에는 기본적인 애프터눈 티 구성에 샴페인 혹은 로제 스파클링 와인 등을 곁들여 호화 롭게 즐길 수 있다. 티 세트뿐 아니라 움직임마저 기품 있게 느껴지는 전문 서버, 그리고 그들이 테이블에 내려놓는 컵과 소서를 보고 있노라면 다시 한 번 탄성이 나온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우아한 패턴과 골드와 민트 컬러가 어우러진 컵과 소서는 이곳의 전용 다기로, 원한다면 켄싱턴 궁 내의 숍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하이드파크 못지않게 런던 여행 코스로 빠지지 않는 명소 중 하나가 사치 갤러리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미처 챙기지 못해 안타까운 곳이 있으니, 바로 사치 갤러리에 딸린 레스토랑 갤러리 메스 Gallery Mess 다. 사치 갤러리의 감각적인 현대미술품으로 단장한 갤러리 메스에서는 합리적인 가격의 애프터눈 티를 경험할 수 있다. 2단 트레이는 정통 영국식 샌드위치(오이, 훈제 연어, 달걀 마요네즈 등)와 스콘, 계절 과일을 얹은 컵케이크, 초콜릿 무스 타르트, 마카롱에 이르기까지 심플하면서도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메뉴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애프터눈 티 세트. 원하는 토핑을 얹을 수 있는 DIY 컵케이크와 종이접기 세트를 함께 제공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One Aldwych ADRESS 1 Aldwych, London WC2B 4BZ, UK / WEB www.onealdwych.com
Juliana’s Afternoon Tea Class CONTACT giulianaorme@yahoo.co.uk / WEB www.afternoontealessons.com

아이는 물론 어른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애프터눈 티 세트도 있다.

영국 작가 로 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한 호텔 원 앨드위치 One Aldwych의 애프터눈 티 세트는,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 장면이 그대로 살아난 듯 환상적이다. 클래식 애프터눈 티의 틀을 깨는 창의적인 구성 요소를 살펴보자. 작은 잔 속에 담긴 초콜릿 캐러멜 우유, 바닐라 치즈 케이크와 망고 퓌레로 속을 채운 금빛의 달걀 모양 초콜릿, 달콤한 솜사탕까지 하나씩 맛보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만한 모양새다. 물론 샌드위치나 스콘, 그 외 케이크도 손색없이 갖추었다. 이곳의 애프터눈 티는 감미로운 초콜릿 향이 맴도는 ‘초콜릿 티’와 함께 즐기거나 위스키, 샴페인, 체리 리큐어가 어우러진 ‘칵테일 찰리’를 함께 홀짝인다면 훨씬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아쉽게도 이 깜찍한 애프터눈 티 세트는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가 아니라 호텔 셰프 도미닉 Dominic 이 만들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란 소설에 푹 빠졌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죠. 소설 속의 재미 요소가 애프터눈 티에도 그대로 담겼으면 했어요.”

사실 영국 애프터눈 티 문화의 기원은 빅토리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서는 아침을 푸짐하게 먹고, 점심은 거르거나 간단히 해결하며, 오후 8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배드포드 공작 7세의 부인인 애나 마리아는 식사와 식사 시간 사이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간식과 함께 ‘오후의 차’를 즐기곤 했다. 이후 손님들을 초대해 이를 함께 즐기게 되면서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고, 이내 애프터눈 티는 즐거운 사교 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현대의 런던에서 이러한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줄리아나의 애프터눈 티 클래스 Juliana’s Afternoon Tea Class에 참여해보자. 1860년대 전통적인 빅토리아 양식의 가정집에서 클래스를 운영하는 줄리아나는 가족의 입맛을 책임지던 출중한 요리 실력과 다년간 쌓은 노하우로 이 클래스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08년에는 클래스 내용을 살뜰하게 담은 책 <Afternoon Tea at Home>을 출간하기도 했다. 애프터눈 티 클래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담긴 안내서를 나눠주며 본격적인 클래스가 시작되는데, 한국어와 일본어 버전까지 갖추고 있다. 코스에는 대부분의 애프터눈 티 세트 구성에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는 샌드위치 종류와 스코티시 쇼트브레드를 직접 만들어보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 어 더욱 특별하다. 티푸드를 만든 뒤에는 대표적인 홍차의 특징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이후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본격적인 애프터눈 티 세팅을 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차를 우려내는 적절한 방법, 컵과 소서는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에티켓, 차에 설탕이나 우유를 넣은 뒤에는 티스푼으로 둥글게 휘젓기보다는 앞뒤로 두어 번 가볍게 움직이며 섞는 방법이 보다 우아한 방식이라는 팁까지 상세하고 친절한 줄리아나의 설명이 티타임 내내 뒤따른다. 다른 무엇보다도 줄리아나의 애프터눈 티 클래스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지인들과 즐기는 오후의 티타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오감으로 깨칠 수 있다는 것.

글. 김나영사진. 조지영